수석(壽石)
수석(壽石)
수석의 본질에 대해서
인간이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수석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성장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아야만 그 본질에 접할 수 있다고 본다. 수석의 본질에 대한 필자의 소견은 신(神)의 실재(實在)를 볼 수 있는 “예술(藝術)의 방점(傍點)”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수석을 통해서 신의 실재(實在)를 직시할 수 있는 가장 돋보이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적 행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예술이 인간의 삶을 창조에 가까울 만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 결국 창조의 주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수석의 개념(槪念)과 돌의 선택(選擇)에 대해서
수석의 개념에 대해서는 영어권에서는 Viewing stone(감상하는 돌)으로 그 개념을 정리하는 것 같고, 일본의 경우는 물과 돌인지, 물속의 돌인지 여하튼, 水石(수석)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이에 반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은 수석의 개념을 취미 활동으로 돌을 모으는 수집(蒐集)이나 감상의 차원을 넘어 “생명이 있는 돌”의 의미, 즉 壽石(수석)으로 개념을 짓는다. 생각건대 수석의 개념을 Viewing stone, 즉 감상하는 돌로 정리한다면 감상하는 돌의 범위에서 절단석(切斷石)이나 연마석(練磨石), 조석(彫石)의 경우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수석의 범주에 포함될 것이고, 그러나 수석의 개념을 “생명이 있는 돌”, 즉 壽石(수석)의 의미로 정의한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자를 수 없듯이 돌을 절단하는 절단석이나 돌을 갈아서 만드는 연마석, 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모양을 낸 조석(彫石)의 경우는 수석(壽石)이라 볼 수 없고 가공석(加工石), 즉 공산품(工産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개념은 수석의 매매 요건에 있어서 “수석의 매매는자연석에 한한다.”라는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자연석 이외의 절단석이나 연마석 또는 조석 매매에 수석 매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수석계의 잡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만약 인조석(人造石), 즉 절단석이나 연마석, 조석을 자연석이라고 판매할 경우 사기죄의 법적책임이 따를 것이고, 민사상의 문제는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 책임이 따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절단석이나 연마석, 조석은 자연석으로 취급될 수가 없기 때문에 판매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 여부를 고지(告知)해야 할 것이다. 개념의 중요성이 또 한 번 강조 되는 대목이다.
지금 수석인들 사이에서도 절단석이나 연마석, 조석(彫石) 등에 대해서는 공산품(工産品)으로 취급하는 것이 중론(衆論)인 것 같다. 이러한 관행을 볼 때 자연석의 재산적 가치는 이미 자리를 잡았다 할 것이고, 수석 마니아(Mania)들이 자연석만 고집하는 것도 이런 연유(緣由)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흐름에서 본다면 수석의 개념은 “생명이 있는 돌”, 즉 壽石(수석)으로 정의하는 것이 옳다. 또한 수석 매매는 자연석으로한정해야만 수석 매매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돌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수석에 대한 개념의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이해되었기를 바란다.
수석계의 현실에 대해서
“수석을 하려면 상당한 화채(花債)를 바쳐야 한다.”고 말하는 경험 있는 수석인들의 발언은 조언(助言)이 아니라 수석 매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종의 경고성 발언이다. 수석 행위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취미로서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자연석을 고집할 경우는 투자가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석 입문자들이 수석에 환멸을 느끼고 수석 행위를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이유는 수석에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수석 행위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수석상, 즉 수석을 매매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사기나 폭리행위 등의 피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면 수석 행위는 음악, 미술, 조각 등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 행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수석의 감상에 대해서
수석에 대한 감상은 보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산수경석(山水景石)이 있는가 하면 보는 안목에 따라 명석이 될 수도 있고 별 볼일 없는 짱돌이 될 수도 있는 그 뜻이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한 돌들도 아주 많다. 이러다 보니 별 볼일 없는 돌을 갖다 놓고 천하의 명석이라고 허풍을 떠는 경우도 있고, 비싼 돈을 주고 건축 자재에나 쓸만한 잡석(雜石)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 더 나아가 소위 “따로 돌”이라 말하는 조석을 구하여 명석이라고 감상하다 그 진위를 알고 나서 절망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고자 하는 돌 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찾는 것이 명석을 찾는 과정이고 그 돌을 감상하는 깊이라고 생각하는데, 숨은 그림을 찾는 것과 같은 것도 있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심미안(審美眼)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느냐에서 안목이 결정되고 감상이 달라진다고 본다. 수석의 감상은 미술품이나 음악 등 다른 예술과 달라서 명화(名畫)나 명곡(名曲)처럼 해설도 없고 작가에 대한 배경 설명도 없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고, 왜 그런 돌이 생겼는가도 알 길이 없다. 단지 산지가 어디라는 것과 사이즈만 알 수 있을 뿐인데, 산지(産地)마저 불확실한 게 많다. 모든 것이 느낌과 그 사람의 안목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당히 함정이 많은 예술의 장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수석과 치유(治癒)
수석은 인간을 치유시킨다. 수석 생활이 육체와 영혼을 어루만진다는 것을 느꼈다면 애석인이 되었다고 본다. 수석은 한마디로 극과 극을 어루만진다. 실재와 상상을 어루만지고, 내면과 외면을 어루만진다. 밤과 낮을 다루고 무의식과 의식을 건드린다. 극과 극이 상존하는 세계의 신비함이 궁극에는 인간의 신비함에 다다르게 되는데 여기서 삶의 동력이 생성되고 치유가 일어난다. 음악 치유나 미술 치유를 받는 것, 즉 예술의 신비함이 인간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의 방증(傍證)이다. 수석은 예술 행위의 방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수석의 신비함에 빠져들면 헤어나 올 수 없는 이유도 수석의 신비함이 인간의 신비함과 같아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